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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이 보고 많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뜻을 세우고 푯대를 바라보는 일.  유한양행은 어릴 때부터 주변에서 드물지 않게 보아온 상표인데,
그 설립자에 대한 글은 처음 접했습
니다.< facebook 의 최수도님의 글>




 

1971 년 3월 11일 새벽,  유일한 박사의 담당의사로부터 연락을 받은 유한양행 관계자들이 속속

세브란스 병원으로 모여들었다. 병실 안에서는 재라와 순한, 그리고 평소 일한과 절친했던 몇몇

사람들이 일한의 임종을 지키고 있었다. 아침 나절이 지난 후, 병실에서 재라와 순한의 통곡소리

가 새어나왔다.

 

"아버지, 나를 이렇게 두고 가시면 난 어떡합니까?"

"오빠, 오빠, 오빠마저 떠나가면 이 순한이 누굴 의지하고 산단 말이오."

 

아 내와 아들도 지켜보지 않는 가운데 일한은 파란만장하면서도 올곧았던 76년간의 삶을 마감하고

오전 11시 40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유족들이 일한의 유품을 정리해보니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들 몇 가지와 구두 두 켤레, 양복 세 벌밖에 없었다.

 

많 은 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장례식은 치러졌고, 4월 4일 오전 유한양행 사장실에서 일한의

유언장이 개봉되었다. 그 자리에 회사대표로 조권순 사장, 김학수 부사장, 가족대표로 유재라와

유순한, 공증인으로 고인의 친구인 법학자 이종극이 입회하였다. 그리고 4월 8일 유언장이 공개되었다.

 

유언장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았다.

 

  • 첫째, 유일선의 딸, 즉 손녀인 유일링(당시 7세)에게는 대학 졸업시까지 학자금으로 1만 불을 준다.  
  • 둘 째, 딸 유재라에게는 유한공고 안에 있는 묘소와 주변 땅 5천 평을 물려준다. 그 땅을 유한동산으로 꾸며 달라고 하면서 이런 부탁을 덧붙였다. '유한동산에는 결코 울타리를 치지 말고 유한중, 공업고교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하여 그 어린 학생들의 티없이 맑은 정신에 깃든 젊은 의지를 지하에서나마 더불어 느끼게 해달라.'
     
  • 셋 째, 일한 자신의 소유 주식 14만 941주는 전부 '한국 사회 및 교육 원조 신탁기금' 에 기증한다. (일한은 이 신탁기금에 이미 9만 6천 282주를 기증한 바 있었다. 그리하여 23만 7천 223주를 소유하게 된 신탁기금은 나중에 "유한재단" 으로 발전하여 유한양행 최대주주가 된다.)
  • 넷째, 아내 호미리는 재라가 그 노후를 잘 돌보아주기 바란다. (아내에게도 재산을 물려준다는 말이 없다.)
  • 다섯째, 아들 유일선에게는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거라' 는 말만 남겨놓았다.
  • 여섯째, '아무에게 돈 얼마를 받을 것이 있으니 얼마는 감해주고 나머지는 꼭 받아서 재단 기금에 보태라' 는 식으로 세세한 금전 거래까지 밝히고 있다. :

 

유언장이 공개될 때 회사대표로 참관하였던 조권순은 자기와 관련된 유언장 내용을 보고 한편 놀라면서도

그러면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한의 유언장이 공개되자 언론매체에서는 신선한 충격을 받은 듯 '나의 전재산 학교 재단에',  '아들엔

한푼없이 자립하라' 식으로 제목을 달아 대서특필하였다.

 

자신의 모든 소유를 자식들에게 대물림하지 않고 사회에 고스란히 환원한 일한의 결단과 정신은 우리사회

에서 두고두고 귀감이 되고 있다. 

 

- 유일한 평전 본문중에서 -

 

유 일한 평전을 읽다보면 정경유착의 고리가 끊어지지 않고 내려온 이 나라에서  이처럼 훌륭한 기업가가

계셨구나 하는 생각과 그분과 그분의 가족들이 살았던 격동의 시대를 생각하면 그분이 이룩한 업적이

얼마나 대단하며 그분이 지켰던 청렴한 기업 정신이 얼마나 훌륭한지 새삼 가슴 깊이 와 닫는다 .

 

 

기 업을 개인의 소유가 아닌 국가와 사회의 소유라고 생각하시는 마음이나 돌아가시는 그날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 하신 일들 이 모든 것들이 감동에 감동을 더하였다 . 정경유착과 기업윤리가 땅에 떨어져 버린

현실에 그분의 기업운영 방식은, 올바른 기업철학과 기업윤리는 물론 애틋한 민족애와 국가관까지 만나볼

수 있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된다 .

 

정 성껏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 봉사하고, 정직 성실하고 양심적인 인재를 양성 배출하며,

기업이익은 계속 기업을 키워 일자리를 만들고, 정직하게 납세하며, 그리고 남은 것은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환원한다" 이것이 그의 기업철학이고 신조였다.

 

기 업가인 동시에 교육가로, 사회사업가로, 독립운동가로 자기에게 주어진 시대를 뜨거운 가슴으로 안고

살다 떠나간 故 유일한 회장의 일대기-  세금을 항상 먼저 내시고, 단 한번도 탈세 하신 적이 없고 정치

자금을 상납하신 적이 없는 그분의 기업가 정신을 이 시대의 모든 기업가들은 항상 마음에 새기고 본받아야

할 것이다.

 

 “눈으로 남을 볼 줄 아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다. 그러나 귀로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알고

  머리로는 남의 행복에 대하여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더욱 훌륭한 사람이다“

    - 유일한 박사 명언중 -

 

*   *   *   *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것으로 유명한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

그는 우리나라의 제약산업을 얘기할때 빠질수 없는 인물이다.

 

- 1896년 평양에서 8남매중 맏이로 태어남.

- 부친 유기연은 서양문물에 눈뜬 상인으로써 한일합방이 되자 북간도로 건너가 항일독립운동을 도움.

- 유일한은 부친의 영향으로 1904년 9살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남.

 

-미국에 건너간 유일한은 네브래스카주에서 초중고시절을 보내는데 성적도 뛰어났을뿐 아니라,

네브래스카주에서 가장 뛰어난 미식축구선수로도 이름을 날렸다.-고등학교 시절까지 유일한의 이름은

'유일형'이었다.

 

그는 조국을 잊지 않고 살겠다는 의지로, '유일한'으로 이름마저 바꾼다. 그의 영향으로 아버지 유기연은

그의 동생들 돌림자마저 모두 바꾼다.(중한, 선한, 영한,신한)

 

-고등학교를 마친 유일한은 미시간대 상과계열에 입학한다.

 

-그는 한국인자유대회에서 '한국국민의 목적과 열망 결의문'을 작성하고 발표, 그 결의문대로 평생 실천

 하며 살게됨.

-1920년 대학을 졸업한 유일한은 세계적 전기회사인 GE에 동양인 최초의 회계사로 취직했고, 1년뒤

 동양현지 총책임자를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는다.

 

-1924년, 고국에 돌아온 유일한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에비스 원장을 만난다.

 에비스원장의 영향으로 중국출신의 부인 호미리와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1926년 가을 회사를 정리하고

 영구귀국 하기로 결심한다.

 

- 귀국한 유일한은 비참한 일제치하 고국의 실정을 보고, 교수직을 맡기로 했던 당초계획을 바꿔 단순히

  영리만을 목적으로한 기업경영이 아닌 민족에 봉사하기 위한 기업경영을 시작한다.

 

- 수입약품을 주로 판매하던 유한양행은 창립된지 5년만에 탄탄한 기반을 잡고, 만주, 중국, 동남아까지

  판로를 확장한다.

 

1936년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학자인 데이비드 발레트 박사를 초빙해 제약의 기술 책임자 자리에 앉히고

수입약품에 못지않은 질 좋은 약품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 1946년 유한양행의 재건에 힘쓰는 한편, 대한상공회의소 초대 회장을 역임한다.

 

-유일한은 숱한 정경유착의 유혹을 물리쳤고, 그로 인해 많은 불이익을 당한다. 그러나 그의 경영원칙은

 단 한번도 흔들림이 없었다. 1968년 세무사찰을 받은뒤 국세청으로 부터 모범납세업체로 선정된다.

 

-1969년 기업의 제일선에서 은퇴하면서, 혈연관계가 전혀없는 전문경영인에게 경영권을 넘기고 전문경영인

 시대를 연다.

 

- 그는 1954년 부터 본격적인 교육사업을 시작했는데, 자신의 사재를 털어 고려공과기술학원을 세웠다.

  이후 한국직업학원, 유한공고, 유한주을 설립하는 등 교육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유한양행

  총주식 40%를 각종 공익재단에 기증하는 등 모든 소유주식을 사회에 넘겼다.-

 

1971년 3월 11일 76세를 일기로 유일한은 그의 나머지 모든 재산 마저 공익재단에 기부한뒤 빈손으로

홀연히 세상을 떠난다.

 

- 그의 딸 유재라 씨도 1991년 미국에서 숨을 거두며 자신의 전재산을 공익재단인 유한 재단에 기부했다.

 2대에 걸쳐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신화를 이룩했다. 한국 경제전문가들이 국내에서 가장 존경하는 기업인,

 전재산을 사회에 되돌려준 참된 기업가, 바로 유일한을 수식하는 말들이다.

 

Il-han Yu (유일한 柳一韓, January 15, 1895 – March 11, 1971), or Yu Il-han, was a Korean independent

activist and enterpriser. He founded Yuhan Co, Ltd.. His original Korean name was Yu Il-hyeong.

Dr. Ilhan Yu, first born in 1895 in Pyongyang among nine brothers and sisters, departed Korea to the United States, at the age of 9 to study abroad by will of his father who wanted to provide his son an opportunity to become a more successful person.

 

While spending his school life in the United States from an early age, had learned about capitalism.

Realizing the difficult situation of his colonized homeland, Dr. Ilhan Yu returned to Korea and established the Yuhan Corporation in 1926 to provide Korean people with opportunities for education and jobs and to solve public health problems.

 

At this period, Dr. Ilhan Yu devoted his life to the independence of Korea by playing a major leading role in the establishment of Mangho-Kun and participating in the NAPKO Project, the Country reclamation operation initiated by Office of Strategic Services of the United States.

 

Dr. Ilhan Yu believed that it was the duty and responsibility of business to develop itself for the prosperity of all of society. He paved the way to practice the social responsibility of business by trading Yuhan in the stock exchange for the first time in the Korean pharmaceutical industry and by starting employee ownership.

When Dr. Ilhan Yu died at the age of 77, he contributed all his wealth to the public foundation named the Korean Society and Education Aid Trust Fund. Jae-Ra Yu, Il-han Yu’s first born daughter, also contributed her entire fortune to a Korean public foundation named the Yuhan Foundation when she died in 1991.

 

The Yuhan Foundation and Yuhan School, trace of Il-han Yu, the largest shareholder of Yuhan Corporation, are active in a variety of public welfare activities, scholarship programs and education for students. These activities are supported by the Yuhan Corporation’s high dividend policy.

 

Dr. Il-han Yu founded the Yuhan Corporation in 1926 under the patriotic notion that “Only healthy people can reclaim their sovereignity.”  Dr. Yu was an entrepreneur, independence activist, pioneering educator, and one of Korea’s first philanthropists. He was devoted to his country, and believed that contribution to social welfare was the responsibility of all businesses, private and corporate.
  • profile
    유일한박사님의 평생 지니신 기도문.
    "삶에 있어서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가를 인식할 수 있고, 오늘날 저희들에게 주어진 좋은 것들을 
    충분히 즐기며, 명랑하고 참을성 있고, 친절하고 우애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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